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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김석봉 전국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

“모든 시민운동의 근본은 생명·환경에서 찾을 수 있죠”

  • 기사입력 : 2013-03-19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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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양군 마천면 창원마을에 살고 있는 김석봉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이 집의 장독대 뚜껑을 열고 장을 살펴보고 있다. 김 씨는 오랫동안 귀농을 생각해오다가 2007년 8월 현재 살고 있는 마을이 좋아 빈집이 나오자 한 달 만에 옮겨 왔다.
    김석봉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이 장작을 패고 있다.



    교도관 출신이 환경운동가로 변신한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교도관은 사회적으로 죄 지은 사람을 바로잡고 법을 준수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교도소에서 체험한 부조리와 불합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인식한 후 사회운동가로 변신했다가 환경운동의 길에 들어서 20년 가까이 환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현재 함양군 마천면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전국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으로 활동 중인 김석봉(57) 씨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14일 함양군 마천면 오도재 인근에 있는 창원마을에서 김석봉 씨를 만났다.

    그는 이날 마을 인근의 논에서 겨우내 얼었던 양파를 돌보다가 찾아간 기자를 맞았는데, 완전 농사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귀농을 오랫동안 생각해오다가 2007년 8월 현재 살고 있는 마을이 너무 좋아 빈집이 나오자 한 달 만에 옮겨왔다는 그의 집에서 환경운동가로의 인생역정에 대해 들어봤다.

    그는 진주환경운동연합(사무국장·상임의장)과 전국 환경운동연합(공동대표)에 일하면서도 그동안 강살리기네트워크 공동운영위원장(2002~2007)과 에너지시민연대 공동대표(2002~2008), 환경연합 조직위원장·중앙집행위원(2005~2006) 등을 지냈다. 함양에서는 (사)숲길 상임이사와 지리산생명연대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



    ◆교도소에서 사회적 의식 키워= 하동 출신으로 옥종고교 재학시절 열혈 문학소년이었던 그는 군복무 후 치른 교정직 시험에 합격한 후 1983년 7월 첫 임지인 경북 청송교도소에 교도관으로 부임했다.

    당시 ‘대도 조세형’과 ‘옥중투사 박영두(1984년 사망)’가 수감됐던 청송교도소는 그에게 인간사회의 모든 불합리와 부조리가 응축된 곳이었고 도저히 그냥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낙천적인 성격에 문학적인 소양이 풍부한 청년 김석봉을 사회문제로 관심을 돌리게 한다.

    6월 항쟁이 발생하던 해인 1987년 1월 그의 임지가 진주교도소로 바뀌었다. 이곳에서 시를 좋아했던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 중이던 시인 문익환 목사와 교류했다. “문 목사는 3월경 진주교도소로 오셨죠. 당시 문 목사 방 담당은 교대근무를 했는데, 가급적이면 그쪽만 담당을 해달라고 했죠. 그리고 신문도 챙겨서 넣어 드리기도 했습니다.” 문 목사를 통해 현재 강기정 통합민주당 의원 등 교도소 내의 많은 양심수를 알게 됐고, 그들을 이해하면서 자연스럽게 스스로 의식화(?)됐다.

    6월 항쟁의 결과로 1987년 연말에 양심수들이 특별사면으로 대거 석방되자 교도관 생활에 흥미를 잃은 그는 사회운동을 위해 1998년 미련 없이 사표를 쓰고 나온다.



    ▲환경운동가로 변신= 교도소를 그만두고 곧바로 환경운동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1980년대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던 그는 이전에 몸담았던 ‘남도시동인’ 회원들을 주축으로 진주청년문학회를 결성, 회장을 맡았다. 이를 발판으로 진주민족예술단체협의회를 조직해 사회운동에도 관여했다. 이 당시 그는 환경운동과 무관했고 농민·노동자·빈민 등 기층민중의 삶에 더 관심이 많았다.

    환경운동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그를 이쪽 방향으로 접어들게 한 것도 우연히 다가온다. 1993년 12월 우루과이라운드(UR)가 타결된다. 우리농산물살리기운동으로 우루과이라운드를 저지하는 운동이 진주에서 강하게 일어났고, 당시 UR대책위의 집행위원장을 맡게 된 것이 그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 것이다.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진주환경운동연합에 사무실을 같이 쓰면서 자주 드나들었죠. 그러면서 책도 보고 환경연합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환경운동이 중요하고 모든 운동의 근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 참에 사람이 없어 상근하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잘된 일이었습니다.”



    ▲환경운동가 활약상= “처음 환경운동을 하던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환경단체가 행정기관보다 신뢰가 높아 동네의 사소한 일을 비롯 각종 민원이 많아 현장확인 등을 위해 매우 바빴습니다.”

    당시 환경문제가 서서히 부각되지만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몰라 환경단체에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그는 ‘성격이 진솔하고 낙천적이며 어려운 일에 직접 나서 몸을 던지는 행동가이자 실천가’로서 자리 잡는다.

    1997년 경남도가 서부경남 관광개발의 일환으로 산청에 둔철골프장 건설을 추진하자 그는 앰프를 사서 매일 현장에 나가서 반대운동을 펼쳐 골프장 건설 계획이 무산됐다.

    1999년 지리산 식수댐 반대운동에도 적극 나서 댐을 저지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정부가 12개 댐 건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진주를 시작으로 공청회를 개최하려던 것을 실력 저지로 무산시켰다. 2001년 9월 그는 댐 반대운동을 위한 결정판으로 남강댐을 출발해 함양, 경북 김천·상주·군위·전북 임실과 남원 등 12개 댐 건설 예정지를 도는 ‘자전거 1인 시위’에 나선다.

    지리산 식수댐 계획은 불교계의 참가를 이끌어내며 남원 실상사 선방에서 정진하던 수경 스님을 환경운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이 외에도 2002년 진주를 자전거 중심도시로 바꾸려는 자전거 프로젝트 운동을 비롯, 쓰레기 재활용운동, 남강생태회복운동, 환경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2009년 전국환경운동 공동 대표를 맡고 난 후에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보 점거농성 등 각종 반대운동을 적극 펼쳤다.



    ▲앞으로 계획= 뒤돌아보면 환경운동을 시작할 당시 사회적 관심이 커서 어려움은 없었다. 어떤 운동이든 생명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운동은 정통성과 당위성을 찾기 힘들고 모든 시민운동의 근본은 생명,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환경운동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거기다 공공의 가치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며 산 것도 큰 가치로 여긴다.

    “앞으로 지리산 일대를 환경적으로 훼손되지 않고 생태가 살아있는 터전으로 가꾸고 싶은 마음입니다. 주민들과 함께 대안을 찾아가는 일들이 보존의 원동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지리산 산꼭대기에만 올라가는 것보다 골짜기 마을과 역사, 생태를 찾아서 몸소 배우고 느낄 수 있도록 사회적 기업으로 여행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면 지자체도 턱없는 지리산 계획을 만들지 않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진주환경운동연합 등에 일이 있으면 수시로 참여한다는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 자체가 이제 성장과 공급 중심주의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제 생활주변의 환경문제는 많이 해소되고 정치적으로도 많이 수용되고 있기 때문에 대규모 자연자원을 이용하는 성장문명의 헛된 거품을 빼지 않으면 사소한 정책을 써도 소용이 없다는 것. 우리 스스로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절제와 자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글= 이명용 기자

    사진= 성승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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