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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전통 사찰 이야기 (4) 고성 옥천사

임진왜란 때 승군 활약한 호국불교 대표 사찰

  • 기사입력 : 2013-02-21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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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대표 건물인 경남유형문화재 제53호 자방루.
    오른쪽 전각이 탐진당. 중앙에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면 대웅전이 있다.
    절 창건 전부터 있었던 옥천(샘)을 보호하는 옥천각.


    지방도로 1007번을 따라 가다가 옥천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옥천사 집단시설지구다. 넓은 주차장을 지나 계곡을 따라 거슬러오르면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인 천왕문이 보인다.

    천왕문의 통로 좌우에 사천왕이 그려져 있다. 천왕문 옆으로 계곡물이 흐른다. 맑고 넉넉한 물소리를 들으니 마음속의 때가 씻어지는 듯하다.

    옥천사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화엄학을 선양하면서 국내의 영지를 가려 세운 화엄 10찰 중 하나라고 전해진다. 옥천사 창건연대를 부석사 창건연대인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으로 보는 것은 그 전후에 옥천사가 창건됐기 때문이다.

    옥천사의 신라시대 역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신라말인 효공왕 2년(898년)에 진경국사 심희가 이 절에 들어와 먼저 주석하고 있던 낭림선사와 도반을 맺고 가람을 크게 수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혼용대사, 혜거국사, 혜은대사, 묘응대사, 보융대사, 지운대사, 원오대사 등 고승 대덕들이 주석하면서 절을 수축하고 승풍을 진작시켰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현상 유지만 하다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사 승려들이 의승군을 조직, 왜군에 대항했다. 왜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정유재란(1597년) 때 절 건물을 모조리 불태워 이후 40여 년 동안 절터는 잡초만 무성한 채 폐허로 내려왔다.

    인조 17년(1640년)에 학명대사가 인근 대둔리 촌락에서 하룻밤 유숙하다가 신인(神人)이 인도하는 곳에 대가람의 도국이 나타나는 영몽을 꾸고 다음 날 이곳을 찾아 명당의 절터임을 알고 도반인 의오대사와 힘을 합쳐 7번째 중창을 했다.

    옥천사는 호국불교의 대표적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 승군의 활약이 돋보이자 조정에서는 국방에 이용할 목적으로 해안지대에 있는 사찰에 승군을 양성했다. 현재 옥천사 넓은 마당은 승군의 훈련장이었으며 자방루는 편장이 앉아 승군을 지휘하거나 비가 올 때 승군을 교육시키던 장소였다.

    옥천사는 조선시대 불교 핍박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정조 말기(1800년 무렵)에 어람지 진상사찰로 지정돼 철종 14년(1863년)까지 닥종이 제조부역에 시달렸고 계곡 곳곳에 물레방아가 줄지어 있었다고 한다.

    임금이 열람하는 글이나 그림의 바탕재인 어람지를 생산하기 위해 당시 연화산 일대는 닥나무가 대규모로 재배됐고, 스님들은 그 닥나무로 어람지를 만들어 왕실에 바쳤다. 당시 옥천은 닥나무 껍질(흑피)를 담가 불리던 작업 현장이었고, 물레방아는 탈색된 백피를 찧고 두들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동력이었다. 심한 노역에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하나둘 흩어지자 현종 8년(1842년)에는 상주 승군의 정원을 170명에서 100여 명으로 줄이고 닥종이 물량도 크게 감량해 줬지만 그것조차 감당하지 못해 고종 17년(1880년)에는 10여 명의 승려만 남았다고 한다.

    철종 14년(1863년) 당시 통제영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던 위당 신관호가 옥천사를 방문해 연화옥천이라는 글씨를 썼는데 이때 농성화상이 어람지 진상사찰에서 면제시켜줄 것을 호소하자 위당이 조정에 장계해 마침내 닥종이 부역을 면제받게 됐다. 이때부터 대중이 늘고 사세를 회복해 구한말까지 상주 승려 100~200명에 12승방이 있었다고 한다.

    20세기 들어서는 광복 이후 교단 정화와 불법 중흥을 위해 헌신한 청담대종사가 1927년 삭발하고 승려생활을 시작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천왕문을 지나니 왼편에 붉은 벽돌담의 비각이 서 있다. 벽돌담 오른쪽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아무리 고관이라도 이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오라는 표시다. 옥천사에 임금의 수복을 비는 축성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마당에 들어서니 자방루(滋芳樓)가 마치 거대한 성채처럼 석축 위에 앉아 있다.

    경남유형문화재 제53호 자방루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뛰어난 건물이다. 이 건물은 간결한 구조이면서도 튼튼하게 건립돼 우천시 승군 340명이 앉아도 끄떡없게 지어졌다. 장혀와 창방 안팎에 산수화 1점, 새 그림 1점 식으로 40여 점의 진기한 새 그림을 그려놓아 우리나라에서 새 그림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희귀한 건물이다.

    자방루 왼쪽에 있는 옥천문을 지나니 네모난 마당이 나온다. 이 마당을 중앙에 두고 자방루와 대웅전이, 탐진당과 적목당이 마주보고 있다.

    대웅전은 경남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돼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3출목(出木), 다포계(多包系)의 건물이다. 포(包)란 지붕의 무게를 분산하기 위해 목재를 여러 겹 포갠 전통건축기법으로 밖으로 내민 뾰족한 쇠서가 3개면 3출목이라 한다. 현판 글씨는 영조 때 동국진체풍의 대가인 기성대사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옥천각은 맞배지붕으로 된 작은 전각으로 이 절의 이름이 된 옥천(玉泉)을 보호하는 수각이다. 옥천은 이 절을 창건하기 전부터 있었던 샘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으며 예부터 병을 고치는 효험이 있다고 한다. 물은 수평일 때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지만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특징이 있다.

    옥천사 유물전시관인 보장각에는 보물 제495호 임자명 반자를 비롯해 대종, 청동은입사향로, 지장보살탱화, 고문서 등 120점의 경남유형문화재가 전시돼 있다.

    글=양영석 기자·사진= 성민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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