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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34) 유홍준 시인이 찾은 진주 형평운동 사적지

진주정신이 궁금하다꼬? 애나가, 그라모 따라온나

  • 기사입력 : 2013-02-14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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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성 앞 형평운동기념탑. 최하층 천민계급인 백정이 평등사회를 요구하며 벌인 형평운동의 상징물이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남녀는 서로가 서로를 귀히 여기며 함께 인간 사랑의 길을 가자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망진산 봉수대에 있는 신현수 선생 송공비.
    형평운동가인 백촌 강상호 묘소.




    당신의 역사 공부 실력은 얼마나 되는가. 2011년도 수능 ‘한국근현대사’ 문제 중 하나를 내겠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다. 고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고자 함이 본사의 주지이다. …(중략)… 이에 지위와 조건 문제 등을 제기할 여가도 없이 목전의 압박을 절규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들의 급선무라고 설정함은 당연한 것이다.

    문. 다음 주장을 한 단체의 설립 목적으로 옳은 것은?

    1. 소작 조건의 개선
    2. 노동자의 지위 향상
    3.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
    4.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
    5. 가부장적 사회 질서의 타파

    정답은 4번이다. 자, 오늘 나는 이 문제의 정답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 운동의 흔적을 찾아 진주 시내 곳곳을 돌아다닐 생각이다.


    먼저, 진주성 정문을 향해 가자. 이 문제가 진주성과 무슨 관련이 있냐고? 천만에. 진주 하면 다들 촉석루랑 남강, 논개가 먼저 떠오른다고 말하는데, 아니야. 그런 것만 보고 진주를 보았다고 하면 큰 잘못이야. 진주에는 ‘애나가’라는 사투리도 있지만 ‘진주정신’이라는 게 있어.

    진주정신! 당신이 진주사람이라면 알 거야. 진주사람들 속에 들어 있는 이상한 보수와 진보의 양면성! 맞아. 한 몸에 이 두 개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진주고 진주사람들이고 장점이고 단점이지. 어쨌거나. 진주성 앞에 차를 세워. 저기 이상한 조형물 하나가 보이지. 저게 뭐냐고? 형평운동기념탑이야. 진주사람의 정신을 알 수 있는 단초가 되는 곳이지. 진주정신이 총 결집된 곳이고 진주정신이 출발하는 곳이거든. 형평- 형평이라는 말뜻을 알려면 먼저 저울을 알아야 해. 형평이란 저울대 형(衡)에 평평할 평(平)자를 써서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벌인 인권 운동을 말하는 거야. 그 인권단체를 ‘형평사’라고 불렀지.

    젊은 두 남녀가 손을 잡고 전진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사실 저것은 남자, 여자로 표현되었지만 갖가지 차별로 눈물 흘리는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서로가 서로를 귀히 여기며 함께 손잡고 인간 사랑의 길을 나아가자는 의미일 거야. 그럼 누가, 언제, 왜 그런 걸 만들었냐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엔 형평운동(衡平運動)을 ‘한국의 전통적인 최하층 천민계급인 백정(白丁) 계급이 사회적 평등대우를 요구하면서 전개한 운동. 갑오경장 이후 유럽의 민주주의 사상이 들어오고 1920년대 일본의 수평(水平)운동의 영향을 받아 1923년 4월 백정들은 그들의 해방과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며 진주(晋州)에서 형평사를 결성하고 형평운동을 전개했다’고 나와 있군.

    자, 다음 진주교회로 가야겠어. 그런데 왜 무슨 교회를 가냐고? 그러게. 왜냐면 거기에서 이 운동의 원인이 발생했거든. 일테면 촉발된 곳이란 말이야. 알다시피 교회가 어떤 곳이야? 차별이 있는 곳이야, 없는 곳이야? 없는 곳이라고? 그런데 그 시절엔 엄연하게 차별이 존재했어. 일반 신도들이 반대하여 백정들과 따로 예배를 보았다고 해. 그러다가 새 목사가 부임하고 ‘백정들도 일반인들과 함께 예배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문제가 생긴 거야.

    이 동석 예배 거부사건은 교회라는 종교를 통한 백정들의 희망과 좌절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록되었고, 마침내 형평운동의 한 원인이 된 거야. 생각해 봐.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까지 이렇게 차별을 당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자, 그럼 백정이라는 용어부터 공부를 좀 할까. 백정의 백(白)은 ‘없다’라는 뜻으로 고려시대에는 일반적인 농민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나 조선시대에는 가축을 잡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변화되었다고 해. 태어날 때부터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하고. 그 이름에까지도 돌 석(石), 이름 돌(乭), 가죽 피(皮)와 같은 좋지 않은 뜻의 글자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하니 참 기가 막히지. 그리고 교육도 받지 못하고, 일반인과 혼인을 금지했던 건 말할 것도 없고 나이에 관계없이 일반인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해야 했다더군. 진짜로 웃기제.

    이제 옛 진주극장(진주극좌) 자리로 가보자고. 왜냐? 1923년 4월 25일 거기에서 첫 형평운동 발기총회가 열렸거든. 한국근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 하나가 거기에서 출발한 거란 말이야.

    1920년 당시 진주 인구는 2만4000여 명이었고, 그중에서 350명 정도의 백정들이 살고 있었다더군. 백정들에 대한 극단적인 차별의 보기를 몇 가지 들어보면, 1907년 진주교회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백정의 자제들이 학교에 입학하더라도 상민 자제들과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같은 천민 신분이었던 기생들조차도 백정들 모임에 참석하기를 거부할 정도였다고 하니 말 다했지 뭐.

    이런 부당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모두가 평등하기를 원한 형평운동은 1935년 ‘대동사’로 그 명칭이 바뀔 때까지, 일제 식민지 하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왕성하게 활동을 전개한 사회운동이었다는군. 세계적으로 기록될 만한 인권운동이었다는 거야.

    그런데 이 특별한 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된 배경은 뭘까? 1920년대 초 진주는 지금과는 매우 달랐대. 그때 진주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였대. 비교적 일찍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었고 근대 공·사립 교육기관들이 세워져 여러 분야의 운동에 대한 대중적 확산과 운동가들을 배출했는데 특히 진주청년회 중심의 청년운동, 진주노공이 이끌어간 노동, 농민운동, 각 종교단체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던 여성운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더군. 역사적으로 1862년에 일어난 진주민중항쟁을 계기로 진주의 정치·문화적 바탕이 조성돼 있었고. 갑오농민전쟁 때에도 진주는 농민군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곳이었대.

    자, 이제 망진산 봉수대로 가 보자고. 저기 조그만 비석 하나가 보이지. 저게 바로 신현수 선생 송공비야. 형평운동 지도자 중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선생은 비 백정으로서 진주지역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지식인 출신의 운동가들이었어. 나머지 장지필, 이학찬 선생 등은 백정의 후예였고,

    장지필의 경우 일본에서 유학하고 난 뒤 총독부에 취업을 시도하였지만 민적등본의 도한 표시로 좌절한 뒤 형평운동에 뛰어든 지식인 출신이었고, 이학찬은 진주공설시장서 고기판매업을 통해 상당한 경제력을 갖고 백정사회를 지도하던 인물이었대.

    하여간 신현수 선생이 백정이 아닌 지식인이었던 관계로 저 송공비를 펜촉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해. 저 펜촉 속에 든 조그만 비석 보이지. 저건 말이야. 본래 망경동 섭천못 근처에 세워져 있던 건데, 후에 못이 사라지고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던 걸 진주의 한 단체에서 지금의 저 모양대로 안치를 했다는군.

    다음, 새벼리로 가보자고. 가좌동에서 진주 시내 쪽으로 오다 보면 왜 석류공원 올라가는 길옆에 ‘형평운동가 강상호 묘소’라는 안내판이 보일 거야. 거기가 오늘 최종 목적지야. 진주성 앞 형평운동기념탑이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면 그곳은 진짜 형평운동의 현장, 심장이랄 수 있지.

    지금이야 안내판도 있고 이래저래 좀 관심들을 보이지만 20년 전, 내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정말로 형편이 없었어. 그냥 자손도 없이 방치된 무덤 같았다니까. 백촌(栢村) 강상호(姜相鎬)- 이 이름 석 자만 들어도 나는 또 이내 뜨거워져.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닌가 봐. 누가 선생의 무덤 옆 비석 뒤에다 이렇게 새겨 놓았어. ‘모진 풍진의 세월이 계속될수록 더욱더 그리워지는 선생님이십니다. -작은 시민이’

    그래 맞아, 진주사람들은 모두 다 백촌 선생의 무덤을 좋아해. 마침내 백촌 선생이 애국지사로 추서돼 국립묘지 안장이 가능하지만 유족과 진주사람들은 국립묘지로의 이장을 거부했어. 국립묘지에 안치하는 것보다 강상호 선생의 무덤은 진주에 있어야 그 가치가 더욱더 빛난다는 거야. 참 잘한 결정이지?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신의 부귀와 영화, 안위를 모두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 모든 걸 헌신하고 간 강상호 선생! 그분의 정신이 바로 진주정신이고, 촉석루나 논개만큼이나 소중한 진주의 자산이지. 1887년 6월 3일 진주읍 대안동 1번지에서 진주 부자 강재순의 장남으로 태어나 멸시당하고 억울한 이들을 위해 전 가산을 다 쓰고 돌아가신 선생이 1957년 11월 7일 세상을 떠날 때 그 장례식의 만장 행렬은 끝이 보이지가 않았다더군.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이제 그 만장 행렬은 끊어지고 사람들은 다 공평해졌을까? 혹시 더욱더 악랄한 방법으로, 더욱더 모질고 처절한 방식으로 인간은 인간을 차별하고 있지는 않을까? 형평운동- 교과서로만 배우고 수능 시험으로만 풀고 이내 잊어먹는다면? 말도 안 돼. 그러면 안 돼. 안 되는 거야. 진주사람이라면. 애나로! 맞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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