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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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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31) 유홍준 시인이 찾은 '멋진 소나무 2곳'

거창 신원면 포연대 소나무
합천 묘산면 나곡마을 구룡목

  • 기사입력 : 2013-01-17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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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창 신원면 포연대 소나무

    합천 묘산면 나곡마을 구룡목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다. 가장 흔한 나무이지만 가장 좋아하는 나무, 소나무는 명실공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다. 사시사철 푸른 잎은 송죽지절(松竹之節 : 변하지 않는 절개)을 뜻하고, 강인한 기상과 기품은 송교지수(松喬之壽 : 인품이 뛰어나고 오래 사는 사람)를 상징한다.

    새해가 되면 빠뜨리지 않고 가는 곳이 있다.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나곡마을과 거창군 신원면 구사리다. 거기 우리나라 3대 명품 소나무 중 하나와 맵시가 단연 돋보이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해가 바뀌면 나는 늘 그 소나무들의 짱짱한 기운을 받고 한 해를 시작하려 한다.

    산업화 이후 급속도로 주거공간이 바뀌기 전까지, 우리나라 국민들 대다수는 이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났고 소나무로 지은 밥을 먹었고 소나무로 지은 관을 입고 사후 세계로 들어갔다. 출생에서 사망까지 혹은 그 이후까지.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소나무와 함께한 것이다.

    소나무 잎 말린 것(松葉)과 꽃가루(松花), 송진을 긁어모아 말린 것(松脂)은 한방 재료나 음식의 재료로 쓰이기도 했다. 한방에서의 건위제, 전통음식에서의 송피떡과 송화주가 그것들로 만든 것이다.

    꽃이나 풀이름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무이름을 많이 알면 삶이 풍성해진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자연의 현상(이치)과 삶(세상)을 겹쳐 읽는 오랜 습관을 지니고 있다. 특별히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이치를 환히 꿰뚫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농부다. 그들은 자연과의 오랜 교감과 경험을 통해 매우 높은 수련 단계에 도달한 이들이다. 우리는 그분들 앞에서 다 겸손해야만 한다.

    올겨울에는 유난히 눈이 잦다. 그래서 ‘구구소한도’도 좋지만 자꾸 이인상의 ‘설송도’를 들여다보게 된다. 정선의 ‘사직송도’나 전기의 ‘필송지도’, 추사의 ‘세한도’에 나오는 소나무는 하나같이 우리의 정신이고 뿌리다. 옛사람들이 소나무를 보며 정신을 기르고 가다듬었다는 건 모두 다 아는 사실.

    내가 알고 있는 서부경남의 소나무는 함양 휴천 목현리 구송(천연기념물 제358호), 거창 위천 당산리 소나무(천연기념물 제410호)를 비롯해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하동군 북천면 직전숲과 사천시 정동면 대곡숲의 소나무들이다. 내 고향마을 뒷산 언저리에 또한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지리산 두류봉 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안의면 도림리 앞 바위 사이에 선 소나무들도 인상적이었고 하동 옥종 불무 소류지 옆 소나무도 인상적이었다. 용추폭포 가는 길의 계곡 소나무도 시선을 잡아끌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상림 지나 병곡 가는 길의 개울가 소나무숲 또한 그랬다. 옥천사 경내에서 바라보는 앞산 소나무도 멋졌고 이미 그 명성이 자자한 다솔사 입구 소나무숲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정취암 뒤 벼랑에 매달려 살고 있는 소나무는 또 어떻고.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나무는 거창군 신원면 구사리 포연대 소나무다. 다만 그 나무만을 보기 위해서 몇 번이나 그곳엘 갔는지 모른다. 시인들의 오지여행을 엮어 만든 책에 나는 거기 포연대 소나무를 소개했었다.

    기유년(1549) 팔월, 남명 선생이 그 유명한 ‘욕천(浴川)’이라는 시를 썼던 포연대(浦淵臺)! 인적이라고는 없는 그곳 절벽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나무가 서 있다. 그 생김새, 그 모양이 실로 기가 막히다. 포연대 소나무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천연기념물 소나무처럼 위용을 자랑하지도 않고, 남원시 운봉읍 삼산리 숲의 소나무처럼 작위적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임청정(臨淸亭)과 소진정(遡眞亭)이 만들어주는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무엇보다 포연대 소나무가 주는 매력은 외로움과 고적함에 있다. 아름답다는 것은 외롭다는 뜻. 포연대 소나무 밑 예닐곱 개의 돌의자는 언제나 빈자리로 남아 있다. 이른 봄이 되면 소진정 뒤에는 할미꽃이 핀다. 복사꽃이 피고 생강나무 꽃이 핀다. 임청정 앞으로 흘러가는 작은 수로에 그 꽃잎들을 띄워보는 것도 좋고 수줍은 듯 고개 수그린 할미꽃의 빨간 속살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도 좋다.

    포연대 소나무가 아름답다면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나곡 소나무(천연기념물 제289호)는 장엄하다. 절로 감탄을 하게 되어 있다. 누구라도 입이 쩍 벌어지게 되어 있다. 차마 압도당하지 않을 자가 아무도 없다. 화양리 소나무는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소나무 중 단연 그 덩치로 으뜸이다. 높이 얼마, 둘레 얼마, 이런 말로 나곡 소나무를 표현하는 건 가당찮다.

    나곡마을 올라가는 길은 과연 이런 곳에 마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거칠고 가파르고 형편이 없다. 그런데 그 형편없는 골짜기에 실로 어마어마한 한 그루의 소나무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나곡 소나무 앞에선 자신을 위해 빌면 안 된다고 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빌어주어야 들어준다고 했다. 나는 나를 위해 빌어준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

    처음 이 나무를 만났을 때 나는 멀찌감치서 두 팔을 있는 대로 벌리고 가슴으로 안았다. 그리고 해마다 이 나무를 찾는다. 나곡마을 소나무는 구룡목이다. 껍질은 거북의 등짝을 닮았고 가지는 몇 마리의 용이 몸을 틀며 승천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목이다. 사방으로 돌며 바라보아도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다.

    인목대비와 이 나무가 관계가 있다는 건 다 아는 사실. 광해군 5년, 인목왕후의 아버지 연안김씨 제남이 역모사건에 휘말려 죽임을 당하자 당시 삼족을 멸하는 풍습 때문에 이곳으로 숨어든 김제남의 6촌 동생 규가 처음 이 나무 밑에 초가를 짓고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여간 그건 역사일 뿐, 그저 이 나무는 이 외딴곳에서 묵묵히 온갖 풍상을 다 견디면서도 푸르게 푸르게 그 기상과 기품을 잃지 않고 살고 있다. 세상살이에 휘둘릴 때, 자신이 자꾸 초라하게 느껴지고 자신감이 없어질 때 이 나무를 찾아가보면 좋다.

    나곡 소나무를 보고 내려오는 길엔 ‘묵와고가(默窩古家)’를 찾아가 보는 것이 좋다. 묵와고가(중요민속문화재 제206호)는 소슬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집이다. 선조 때 선전관을 지낸 윤사성이 지은 집이다. 구례 운조루나 함양 정여창 고택, 산청 사양정사 등과는 사뭇 다른 어떤 느낌이 거기엔 있다. 뭐랄까 그건, 단단하다 해야 하나! 뒤꼍에 600년 된 모과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의 단단함과 묵와고가의 느낌이 거의 같다. 정갈하고 소슬하다. 묵와고가는 조선 사대부 저택의 실례로서 주택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한다.

    우리는 왜 옛집을 좋아하고 소나무를 좋아할까? 우리를 닮았기 때문이고 우리가 닮고 싶기 때문이다. 새해가 보름쯤 지났다. 해맞이도 좋고 신년 산행도 좋지만 기품 있는 소나무를 찾아 그 변함없음과 푸름과 당당함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포연대 소나무와 나곡 소나무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겨울 소나무 잎을 맨손으로 쥐었을 때의 그 서늘한 느낌! 그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정신은 맑고 서늘하게! 모름지기 새해는 그렇게 시작할 일이다.

    /글·사진=유홍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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