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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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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비경 100선] (1) 지리산 천왕봉

오른 자만이 누리리라
가장 짧은 중산리 코스도 3~4시간 품을 들여야 한다
매서운 칼바람과 깎아지른 돌계단에 숨이 턱턱 막히지만

  • 기사입력 : 2013-01-03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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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서면 하늘이 열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눈부신 푸른 하늘 아래에 우뚝 솟은 천왕봉에선 볼을 때리는 세찬 바람도 상쾌하게 다가온다.
    천왕봉 아래로 능선이 펼쳐진다.




    경남은 지리산을 비롯해 한려수도 등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 많다. 지리산처럼 언제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기도 하지만 천왕봉에서의 일출은 비경을 넘어 장관이다. 이처럼 특정한 계절이나 특별한 시기에 가면 더욱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곳도 있다.

    예컨대 창녕 우포늪은 한겨울에 가는 것보다 여름에 가는 것이 좋고, 가을 새벽 물안개가 필 때에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남저수지는 가시연꽃이 있는 여름과, 겨울 철새 떼를 만날 때가 제격일 수 있다.

    새해부터 도내에서 경관이 좋은 100곳을 선정해 매주 1곳씩 소개한다.

    지리산은 3개 도(경남과 전남, 전북)의 1개 시, 4개 군, 15개 읍·면을 감쌀 만큼 넓은 품을 가졌다.

    주봉(主峰)인 천왕봉이 해발 1915m로, 남한에서는 한라산 다음이며 내륙으로만 치면 단연 최고다.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으로 숭앙받고 있는 지리산은 넓고 깊은 품을 가진 까닭에 ‘어머니의 산’으로 여겨진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지리산 특히 천왕봉에는 계절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등산객들이 몰려든다. 산을 오르는 이들의 표정에서는 마치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의 그것이 연상되기도 한다.

    오르는 이유가 어떻든, 천왕봉에 오르는 것은 만만찮다. 천왕봉으로 곧장 오르는 길은 중산리 코스, 백무동 코스, 새재 코스, 대원사 코스 등 여럿이다.

    이 가운데 가장 짧은 길은 중산리 코스다.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의 탐방안내소에서 칼바위, 로타리대피소를 거쳐 천왕봉에 오르는 이 길은 5.4㎞로, 그리 긴 코스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도 1300m가량 올라야 하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땀을 깨나 쏟아야 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이 코스의 산행시간을 4시간으로 제시하고 있다.

    취재진이 중산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날은 2012년 세밑을 며칠 앞둔 26일이었다. 오전 9시 45분, 중산리탐방안내소를 출발할 당시의 기온은 영하 5도였다. 풍속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볼을 스쳐가는 바람이 꽤나 차갑다.

    산길로 접어든 지 20여 분 만에 칼바위를 거쳐 장터목대피소 갈림길에 섰다. 여기부터 된비알이다. 이 길을 자주 다닌 사람이라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끝도 없이 이어질 듯한 돌계단과 나무계단을 한 시간 남짓 치고 오르면 헬기장이 나타난다. 이제 겨우 고개를 들어 위를 본다. 멀리 천왕봉이 솟아 있고, 시선을 한참이나 밑으로 옮기면 법계사가 눈에 들어온다.

    묵직해진 발걸음을 조금 더 옮기면 로타리대피소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배낭을 벗었다. 잠시 숨을 돌린 뒤 물을 마시고, 귤을 두어 개 까먹었다.

    지금부터는 아이젠을 덧신고 올라야 한다. 대피소 위쪽의 적설량은 지형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적은 곳은 20~30㎝, 많은 곳은 70~80㎝쯤 된다. 특히 탐방로는 등산객들의 발길에 다져진 눈 때문에 아주 미끄럽다.

    대피소를 나선 지 1시간 10분 만에 천왕샘까지 왔다. 찬바람이 옷을 뚫고 맨살에 닿는다. 몸이 움찔거린다.

    기온이 낮긴 하지만, 바위틈에서는 조금씩 물이 새어나오고 있다. 여러 명이 목을 축이기에도 충분한 양이다. 그러나 기온이 더 내려가면, 이 물을 먹기는 힘들어진다. 모든 것이 꽝꽝 얼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가장 힘든 구간이 남았다. 거리상으로는 300m도 채 안되지만, 땅에 코를 박고 올라야 한다. 돌계단길은 눈에 덮여 경계가 모호하다.

    허벅지가 뻐근하고, 심장이 쿵쿵거리고, 숨이 턱턱 막히고 나서야 천왕봉에 이르렀다. 중산리 탐방안내소에서 3시간 10분이 걸렸다.

    예상과 달리 바람은 세지 않았다. 지금이 겨울, 그것도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포근하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다. 배낭에 쑤셔 넣어둔 다운재킷을 꺼낼 필요가 없다.

    정상석 주변에는 등산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눈에 익은 풍경이다.

    정상석 남단 바위 끝으로 이동한 뒤, 스마트폰의 GPS 앱을 켰다. 10여 초 뒤, 나침반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며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고개를 들어 먼저 남쪽을 바라본다. 햇빛을 받은 바다가 황금빛으로, 때로는 은빛으로 빛난다. 정남향에서 약간 왼쪽으로는 사천과 남해 앞바다, 정남향으로는 광양만이다. 광양산업단지와 여천산업단지의 수많은 공장 굴뚝에서는 흰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눈을 조금 더 위로 치켜뜨면 향일암이 자리한 돌산도와 그 아래의 금오도 끝자락이 들어온다. 일망무제다.

    시야를 발 아래로 좁혀 오면, 사천 와룡산과 하동 금오산, 진주 진양호가 들어온다.

    몸을 오른쪽으로 약간 비틀면, 외국인 선교사 유적지가 있는 왕시루봉과 광양의 백운산이 지척에 있는 듯 다가온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자미눈을 뜨고 한참 먼 곳을 바라본다. 저쯤에 광주 무등산이 있을 듯하지만, 꼭 집어낼 수가 없다.

    눈길을 조금 더 오른쪽, 즉 서쪽으로 돌리면 지리산 주능선이다. 제석봉과 촛대봉, 삼도봉, 반야봉에 이어 노고단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멀리 오른쪽으로는 만복대와 바래봉, 그리고 지리산 능선 끝자락인 남원의 덕두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정북 방향에는 덕유산이 있다. 눈을 덮어쓴 주봉 향적봉과 주능선이 도드라지게 눈에 띈다.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이 아니고서는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없다.

    동쪽 중봉 너머에는 밤머리재와 웅석봉, 그리고 웅석봉에서 남쪽으로 내달리는 달뜨기능선이 자세를 낮춰 자리하고 있다. 중봉은 해발 1874m로 지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지만, 상봉인 천왕봉을 받드는 역할에 만족하고 있다.

    조선 성종 3년(서기 1472년) 음력 8월 중순, 함양관아를 나서 선열암과 고열암, 청이당, 중봉을 거쳐 천왕봉에 올랐던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천왕봉에서 바라본 풍광을 유두류록(流頭遊錄, 두류는 지리산의 옛 이름)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그 성첩(城堞)을 마치 죽 끌어서 둘러놓은 것처럼 생긴 것은 함양의 성(城)일 것이고, 청황색이 혼란하게 섞인 가운데 마치 흰 무지개가 가로로 관통한 것처럼 생긴 것은 진주의 강물일 것이고, 푸른 산봉우리들이 한 점 한 점 얽히어 사방으로 가로질러서 곧게 선 것들은 남해와 거제의 군도일 것이다. 그리고 산음, 단계, 운봉, 구례, 하동의 현(縣)들은 모두 겹겹의 산골짜기에 숨어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중략) 이상의 산들이 혹은 조그마한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용호(龍虎) 같기도 하며, 혹은 음식 접시들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칼끝 같기도 한데, 그중에 유독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이 여러 산들보다 약간 높게 보인다. 그리고 계립령 이북으로는 푸른 산 기운이 창공에 널리 퍼져 있고, 대마도 이남으로는 신기루가 하늘에 닿아 있어, 안계(眼界)가 이미 다하여 더 이상은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민족문화추진회에서 펴낸 ‘점필재집’ 중에서)

    지리산 천왕봉에서 동서남북으로 몸을 돌려가며 바라보는 풍광은 장엄하다. 큰비나 눈이 온 다음 날 아침의 운해도 장관이다. 한겨울, 바위와 나뭇가지에 맺힌 상고대는 그 앞에 선 인간을 숙연하게 만든다.

    천왕봉 서쪽의 바위에는 ‘天柱(천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옛 선인들은 천왕봉을 하늘이 무너지지 않도록 괴고 있다는 상상 속의 기둥으로 여긴 듯하다.

    장터목대피소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중산리 탐방안내소로 되돌아와서 시계를 봤다. 오후 4시 40분, 7시간 만에 산행을 마쳤다. 탐방안내소 주차장에서 천왕봉을 올려다봤다. 천왕봉에 오를 때마다 봐왔던 것이지만, 이날따라 ‘天柱(천주)’라는 각자가 눈에 선하다.

    글= 서영훈 기자·사진= 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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