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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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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77) 황강 25 가야산 해인사 봉황문~정중탑

범종서 울리는 깨우침 소리 들으며 나를 되돌아보다

  • 기사입력 : 2012-11-14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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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탈문과 구광루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범종루.
    해인사 봉황문 가는 길.
    해인사 봉황문.
    김영환 장군 추모비.
    해인사 삼층석탑.
    천년 노목.


    해인사로 가는 가야산 홍류동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가에는 온 산이 깊어가는 가을에 만산홍엽이다. 무더운 여름날 계곡물에 발 담그며 망중한을 즐기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어느새 계절을 바꾸고 있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여행이지만 여행을 떠나는 궁극적인 목적은 다양하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찾아 떠나는 사람도 있고,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휴식과 삶을 재충전하기도 한다.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낯선 곳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며 자신의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찾는 것이라 여겨진다. 진정한 행복의 가치는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월이 흘러 과거 속에서 존재한다. 장성한 자녀들을 보며 어릴 적에 행복했고,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살아생전에 행복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결국 행복의 가치는 현재에 충실하고 노력하면 추억 속에 있는 것이다. 혼자 여행을 떠나 보면 자유롭고 홀가분한 것은 잠시이고 가족들이 그리워진다.


    <김영환 장군 추모비·봉황문>

    가야산 해인사로 가는 길목에 팔만대장경을 역사 속 위기에서 네 번째로 구한 김영환 장군 추모비가 있다. 첫 번째 위기는 일본이 고려 말부터 사신을 보내 팔만대장경을 요구하기 시작해 세종 때에는 대장경판의 자체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이를 지켜 낸 것은 세종 임금이었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 때였다. 해인사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던 것은 당시 이 지역을 지켰던 승병과 의병의 힘이 절대적으로 컸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위기는 해인사에 여러 차례 발생한 화재다. 임진왜란 이후 해인사에는 무려 일곱 차례의 큰 불이 났으나,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장경판전 건물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 네 번째 위기는 6·25전쟁 때였다. 인민군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가야산에 숨자 공비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미군 사령부는 1951년 9월 18일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작전을 지시했다.

    공군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 편대장 김영환(1921~1954) 대령은 기수를 돌려 선회하면서 편대기들에게 폭격 중지를 명령했다. 편대장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고 기관총으로 해인사 밖 능선에 숨은 인민군 진지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해인사 내 팔만대장경은 귀한 우리의 문화유적인데 해인사를 폭격하면 문화유산이 소실된다”며 폭격을 막은 김영환 대령의 의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팔만대장경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고개를 숙여 묵념을 하고 걸음을 재촉해 해인사 일주문으로 들어서, 수문장처럼 버티어 서 있는 천년 노목의 가로수를 따라 80m쯤 가을의 정취에 취해 걷다 보면 해인사의 두 번째 문인 봉황문이다. 이 봉황문은 천왕문이라고도 하며 불교에서 사천왕은 본디 욕계 육천 가운데 사왕천에 머물면서 천상으로 들어오는 여러 착한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사천왕은 수미산의 동서남북에 위치해 악한 것을 멸하고 불법을 옹호하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산문 입구에 봉안해 수문 역과 도량 수호 역을 맡게 했다. 이러한 신중들은 대부분 힌두교의 영향이며, 불교가 대중화하는 가운데 인도의 민간 신앙과 함께 접합될 때 생긴 사상이다. 현재의 건물은 순조 21년(1821)에 고쳐 세운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 옆면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출입문에는 금강역사상이, 내부 양쪽 벽에는 사천왕상이 각각 2구씩 그려져 있다.


    <국사단·해탈문>

    봉황문과 해탈문 사이의 해탈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옆에 국사단이 있다. 이곳은 해인사에서도 아주 영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해인사가 7번 화재를 당했으나 국사단만은 변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음력 보름날 저녁이면 큰 대제를 올렸다고 했다. 국사단 앞에는 해인사를 창건한 승려 순응과 이정이 심었다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국사단은 원래 대가야의 시조신 정견모주를 봉안한 사당이었던 것이고 해인사는 바로 이 사당을 모태로 대가야의 후손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일주문과 봉황문을 지나면 해인사의 제3문인 해탈문이 있다.

    해탈문은 절집의 중문에 속하는 문으로서 일반 사찰의 불이문에 해당한다. 이들 문은 사찰공간의 질서화를 통해 참배자들로 하여금 부처의 세계에의 접근을 실감케 하고, 더불어 경건한 마음을 갖추도록 하는 복합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절집에서는 해탈문을 지나면 완전한 불법의 세계인 주객, 세간과 출세간, 선과 악, 옳고 그름, 나고 죽음 등 대립하는 상대적인 것들을 초탈한 불이법문의 세계로서 삼존불을 봉안한 건물 앞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해인사 일주문에서 해탈문에 들어설 때까지 33계단을 거치는데, 도리천 곧 33천의 궁을 상징한다고 한다. 해탈문의 편액은 혜선 박해근의 글씨이며 ‘해동원종대가람(海東圓宗大伽藍)’이란 편액은 만파스님이 고종 2년에 쓴 친필이다. 해동원종이란 선종구산 13종을 통합 일원화한 진실 원만한 교리를 말하는 종파 즉 화엄종이란 말이니 ‘해동원종대가람’이란 말은 ‘우리나라 화엄종의 큰 절’이란 뜻으로 이해된다.


    <구광루·범종루·삼층석탑(정중탑)>

    해탈문을 나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전각이 구광루이다. 해인사 가람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구광루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내용에서 따온 것인데 옛날에는 큰스님들만이 법당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누각은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이 모여 예불하고 설법을 듣는 용도로 지은 것이다. 건물은 얕은 기단 위에 자연초석을 놓았으며 층마루를 깔았다.

    정면에서 보면 7칸이고 측면에서 보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1818년(순조 18)에 건축했으며 후대에 고쳐 지어 원래의 기능이 상실되어 현재는 절집의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해탈문과 구광루 사이에 범종루가 자리 잡고 있다. 종루에는 중생구제와 깨우침의 소리를 내는 사물(四物)이 있다. 사물은 범종·법고·목어·운판을 말하는데 이 범종각은 사찰의 경내에서 마당을 내려다보았을 때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 왼쪽을 체(우주의 마음)로, 오른쪽을 용(일체사물)으로 말하는 화엄의 사상에 따라 설치된 것이다. 구광루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넓은 마당에 삼층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해인사의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린다. 탑은 3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원래 기단은 2층이었으나 1926년 수리할 때 기단을 넓히고 한 층을 더 얹음으로써 통일신라 탑의 전형인 2층 기단의 모습을 깨뜨렸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의사찰 제7권-해인사. 일지사. 1975.10.30. 발행)’에서도 “석탑은 신라석탑의 일반형에 속하는, 별반 나무랄 데 없는 수작이지만, 1926년 중수 시에 기단을 확장하고 더 높게 하여 신라 탑의 조화를 깨뜨리고 말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월간-해인, 2007년 8월호’에 따르면 고유섭 선생의 <한국탑파의 연구>에는 해인사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수리 이전의 원형태에 있어서 기단이 3단으로 되어 중단, 하단에 모두 안상이 있는 예이다. 고유섭 선생의 학설을 토대로 본다면 해인사 삼층석탑은 1926년 중수로 인해 삼중기단 석탑으로 변형되었다는 학설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해인사 삼층석탑이 원래부터 삼중기단 석탑이었다는 사실은 <조선고적도보>에 실려 있는 사진과 1916년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 첫 방문 때 찍었던 해인사 삼층석탑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유리 원판 사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중략)”고 서로 각각 다른 주장을 하고 있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마산제일고등학교 교사·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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