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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17) 송창우 시인이 찾은 '권환 시인의 고향' 창원 진전면 오서리

시인의 운명을 닮은 듯 그의 옛집도 기억 속에 잊혀져 가고…
텃밭으로 변한 마당·풀에 뒤덮인 우물… 늙은 감나무만 집의 흔적 지킬 뿐
고향마을 오서리엔 민족운동의 요람 경행재·아낙들의 삶 깃든 빨래터 남아

  • 기사입력 : 2012-10-04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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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과 진주, 고성이 만나는 삼각지에 위치하고 있는 권환 시인의 고향인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월안마을과 곡안들녘을 이어주는 월안교와 바위절벽 용대미.
    권환 시인의 생가터에는 늙은 감나무 한 그루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학교로 사용됐던 권씨 문중 재실 경행재.
    양민학살의 아픈 상처를 가진 진전면 곡안리 마을숲.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565번지. 여기, 올 추석에도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집이 있습니다. 아니 집의 흔적을 지키고 있는 늙은 감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초가을 태풍에 바람을 호되게 맞은 감나무는 가을을 타기도 전에 잎이 시들어갑니다. 감나무를 타고 오르던 호박넝쿨들도 축 늘어져서 말라갑니다. 가지 끝에 몇 알 붉은 감이라도 매달고 있었다면 덜 쓸쓸했을 텐데, 감나무엔 감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쓸쓸한 감나무는 안동권씨 세거지, 진사골목이라 불렸던 영광스런 골목의 한 귀퉁이에 있습니다. 한때 500석지기 중농가의 너른 마당을 소유했던 감나무는 이제 텃밭으로 변한 마당과 풀에 뒤덮인 우물과 쓰러져 가는 슬레이트 지붕 하나만을 지키며 삽니다.

    “꽃송이 같은 반시 홍시 / 전설같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에 / 까치 한 떼 날아 앉은 / 저-기 저 집이라오”라고 노래했던 시인 권환의 옛집 풍경입니다.

    옛집의 운명은 시인의 운명을 닮았습니다. 권환(權煥). 그는 오랫동안 성만 있고 이름은 없는 ‘권○’로 존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임화와 더불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을 이끌었고, 광복기에는 ‘조선 문학가 동맹’ 제2대 서기장으로 활약했던 한국 계급주의 문학의 빛나는 별은 우파 이데올로기가 만든 ○속에 유폐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까맣게 잊혀졌던 것입니다. 타향을 떠돌던 시인이 어느 날 깜박 이름을 잊어버렸다는 고향의 뒷산처럼.



    거꾸로 박힌 심장형



    누런 밤나무 잎이

    시냇물 덮어 흐르는



    뻐꾹새 우는 소리

    여기저기 들리는



    내 고향의 뒷산

    나는 온 하루 밤을 자지 못했다

    그 산 이름을 생각해 내려고

    깜박 잊어버린 그 이름을

    -권환, <뒷산>



    시인의 고향 오서리는 양촌들녘을 적시며 지나온 진전천이 창포만 넓은 갯벌과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오서리는 마산과 진주와 고성의 한가운데에 있는 삼각지의 통로여서 마산에서 진주로 가는 길도, 고성으로 가는 길도 모두 오서리를 지납니다. 다만 옛날에는 모든 길들이 오서리에서 잠시 머물렀지만, 이제는 오서리를 그냥 지나쳐서 쏜살같이 내달립니다. 속도를 경쟁하는 새로운 국도들은 출발지와 목적지를 제외한 공간들을 모두 압축시킵니다. 그러는 사이 시인의 마을도 점점 잊혀진 마을이 되어 갑니다. 여전히 변함없이 제 속도를 유지하며 오서리를 지나는 것은 진전천 맑은 물길뿐입니다.

    오서리는 열에 일곱은 일가인 안동권씨 집성촌입니다. 마을 한가운데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맞은편 오서리 옛 장터 뒤에 경행재(景行齋)가 있습니다. 경행재는 권씨 문중의 정신이 깃든 집입니다. 백 년도 더 된 이 집은 건립 초기엔 문중의 재실 겸 한학을 가르치던 서숙으로 사용되었고, 일제 강점이 시작된 1910년부터는 사립 경행학교로 이용되었습니다. 경행학교를 설립한 이는 권환 시인의 부친인 권오봉 선생인데, 그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지역의 선각자였습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하다 순국한 죽헌 이교재 선생과, 기미년 삼진의거를 이끌었던 백당 권영조 의사 등이 모두 경행학교에서 민족운동의 싹을 틔웠으니, 경행재야말로 이 지역 민족운동의 요람이었습니다.

    경행재를 나와 옛 국도변을 따라 걷다 보면 가로수 아래를 흐르는 수로에 오래된 빨래터가 있습니다. 왁자지껄 아낙들의 소리로 떠들썩했을 빨래터엔 이제 햇살만 앉았습니다. 경행재가 문중 남자들의 근엄한 정신이 깃든 공간이라면, 빨래터는 동네 아낙들의 지난한 삶이 깃든 공간입니다. 동네 아낙들이 모여 앉아 빨랫방망이 하나씩을 들고 힘차게 두들긴 것은 비단 빨래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낙들은 힘겨운 세월과 삶의 고통들을 두들겨 패며, 살림살이를 깨끗이 헹구어보기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이 길을 지나다 빨래터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 의식을 치르듯 엄숙히 흰 고무신을 씻고 계신 한 할머니를 만난 일이 있는데, 올해도 여전히 건강하신지, 추석은 잘 보내셨는지 문득 안부가 궁금해집니다.

    길은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오서리 들녘을 지나 월안마을을 지나 진전천을 가로지른 월안교로 이어집니다. 진전천을 가로질러 월안 마을과 곡안 들녘을 이어주는 월안교의 가을은 푸른 하늘과 하늘을 그대로 비춰내는 용대미 맑은 물속에서 고요히 깊어갑니다. 만만 년 세월의 지층을 켜켜이 쌓아올린 바위 절벽엔 붉은 담쟁이와 마삭줄이 늘어져 물결에 흔들립니다. 사람에게도 얼굴이 있듯이 냇가에도 얼굴이 있습니다. 특히 초가을 아침에 만나는 진전천의 얼굴은 참으로 아름답고 싱그럽습니다. 냇가를 뒤덮은 고마리들은 밥풀 같은 흰꽃을 피우고, 아침 햇살에 물봉선 붉은 빛이 살짝 번지는 맑은 물속을 새끼 피라미들이 천진하게 헤엄쳐 다닙니다. 늘 지나치면서도 놓치고 살아온 풍경. 우리네 삶의 어디에도 이렇듯 숨어 있는 풍경들이 있을까요?

    진전천을 건너면 이제 곡안리입니다. 곡안리엔 오래된 마을숲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부터 심고 가꾸어 온 숲. 여름엔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며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겨울엔 북서풍의 찬바람을 막아주며 마을을 지켜온 숲. 나무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 산 팽나무 한 그루는 이제 골다공을 앓듯 밑동에 큰 구멍이 뚫렸습니다. 그 해탈의 구멍을 통과하며 가을 바람이 지나가고, 사그락사그락 해묵은 낙엽들 위로 또 올해의 낙엽들이 떨어집니다. 이 늙은 나무는 올가을 낙엽마다 어떤 사연들을 써 놓을까요? 벤치에 홀로 앉아 저 한 그루 나무의 자서전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곡안숲은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곡안리는 상처가 많은 마을입니다. 조상님들의 차례를 모시는 명절에는 더 상처가 깊어지는 마을입니다. 곡안리 뒤쪽에 앉은 성주이씨 재실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양민학살이 일어났던 비극의 현장입니다. 전투기를 동원한 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피란해 있던 마을 주민 83명이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성주이씨 재실의 돌기단과 기둥과 우물벽에는 그날의 총탄 자국들이 선명히 남아 있고, 마을사람 중에는 아직도 그날의 총탄을 몸에 지니고 사는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냉전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쉬쉬하며 오랫동안 묻어놓고 살아야만 했던 아픈 역사입니다. 곡안리 토담길에서 만난 맨드라미꽃이, 담장 너머에서 쫙쫙 가슴을 벌리고 있는 석류의 속이 더 붉은 이유는 그런 까닭입니다.

    성주이씨 재실을 가운데로 곡안리와 나란히 앉은 마을은 봉곡입니다. 진주강씨의 집성촌인 봉곡은 권환 시인과 함께 카프의 맹원으로 활약하며 미술계와 영화계를 이끌었던 월북예술가 강호의 고향입니다. 강호(姜湖). 그의 이름도 역시 깜박 잊어버린 이름입니다. 그는 1929년 이곳 진전들녘을 무대로 식민지 조선 농민의 암울한 생활을 묘사한 영화 ‘암로’를 만들었고, 1931년엔 도시 빈민들의 애환과 투쟁을 그린 영화 ‘지하촌’을 만들었습니다. 봉곡마을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강호의 옛집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서 압수되고 사라진 그의 필름들처럼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문득 고향이란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의 이름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이 깜박 잊어버리고 사는 그런 모든 존재들의 이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운 이름 하나씩 잊어가고, 정든 집 한 채씩 사라져 가는 곳. 어디 이곳뿐이겠습니까? 며칠 전 그런 고향엘 저도 다녀왔습니다.

    /글·사진=송창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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