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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3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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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④ 유홍준 시인이 찾은 함양 용추계곡

묵은 체증 있거들랑 폭포 꼭대기에 서 보시라

  • 기사입력 : 2012-06-2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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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난 용이 몸부림치듯 힘차게 떨어지는 용추폭포는 물이 깨끗하고 사철 수량이 많다.
     
    연암 박지원 선생이 청나라에서 본 물레방아를 전국에서 처음 만들어 농업에 기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연암물레방아공원이 용추계곡 입구에 있다.
     
    함양 안심마을 이정표.
     
    심진동 대표 정자 심원정.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아침 일찍부터 정신 나간 놈처럼 노래를 흥얼거리며 함양 안의를 향해 차를 몰았다. 온 나라가 가뭄이 들어 식수며 농작물이며 걱정이 태산인데 나는 폭포의 수량이 줄어 사진이 잘 안 나오면 어떡하나, 호사스런 걱정을 하며 달리고 있었다.

    용추계곡은 경남에서는 먼 곳이다. 창원 사람들도 진주 사람들도 잘 안 간다. 오히려 88고속도로를 타고 대구 사람들이 잘 오는 곳이다. 용추계곡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도읍을 정한 무학대사가 정도전의 간계에 몰릴 것을 미리 알고 숨어든 은신처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기백산, 황석산, 금원산, 거망산)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그만큼 골이 깊고 물이 풍부한 곳이다. 수많은 소(紹)와 전설과 바위를 거느린 골짜기다.

    지금은 길이 잘 뚫려 훤하지만 그 옛날엔 안의 사람들도 용추골 사람들을 산중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진리삼매경에 빠져든다 하여 심진동(尋眞洞)이라 불렀다 한다. 백두대간 길의 대야산 용추계곡, 문경 용추계곡, 가평 용추계곡이 있지만 그중 으뜸이 안의 용추계곡이다. 산청을 지나 생초를 지나 오전 10시쯤 용추계곡 초입 안심마을에 닿았다. ‘안심, 안심이라!’ 마을 이름이 좀 웃긴다. 30년 전 처음 이곳엘 왔을 때도 나는 클클클 웃었다. 안심마을 근처엔 ‘마음마을’이 있다. 이제 안심하고 용추계곡으로 들어가도 되겠다.

    안심마을은 중국에서 실학을 배운 연암 박지원이 안의 현감으로 와서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만든 곳이다. 연암은 물레방아뿐 아니라 이곳 안의에서 여러 가지 농기구(織機, 風具, 龍尾(양수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옛날에 실제로 물레방아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은 ‘물레방아체험장’이 만들어져 있다. 개울 건너 대지초등학교 자리는 지금 ‘산촌유학연수원’으로 변해 있다. 근처에 미술관이며 한방체험과학관 같은 것들이 있다.

    마음마을을 지나 ‘기백산군립공원’ 안으로 들어선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 매표소 바로 옆에 심원정(尋源亭)이 있다. 심원정은 심진동을 대표하는 정자다. 옛 안의에는 삼가승경(三佳勝景)이 있었는데 그 유명한 화림동(花林洞) 농월정과 원학동(猿鶴洞) 수승대, 그리고 심진동 심원정이다.

    오전의 심원정은 텅 비어 있다. 30년 전, 나는 이 정자 위에서 촛불을 켜놓고 놀다 비박을 한 적이 있다. 심원정은 별 변함이 없다. 주위에 울창한 소나무 숲도 그대로고 노란 장판을 입힌 평상들도 그대로다. 가뭄 때문에 걱정한 수량은 걱정 없다. 심원정 앞 청심담(淸心潭)은 시퍼런 물로 가득하다.

    멀리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기백산 쪽 하늘이 새파랗고 구름은 희다. 마치 씻어 놓은 것 같다. 이내 ‘연암 물레방아 공원’을 만난다. 공원 앞 매점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로 커다란 물레방아라 카데예.” 나는 대꾸도 안 하고 묻는다. “저기요. 요 밑에 요기, 옛날에 진짜로 물레방아가 있었지요?” “야아, 그란데 그걸 우찌 아능교. 저기 버들나무 숲 속에 있었다 아닌기요.”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나는 실실실 웃는다.

    삼형제바위, 매산나바위, 상사바위, 요강소, 꺽지소, 용소, 이름 없는 바위절벽에 작대기로 쑤시면 근동 여자들이 다 바람이 나서 도망을 간다는 굴까지 용추계곡에는 전설이 많고도 많다. 한 모롱이 돌면 또 전설 하나, 돌 하나 뛰어넘으면 또 소(昭) 하나다. 이 나라 어디를 간들 전설이 없을까마는 용추계곡은 유독이 많다. 얼마나 사는 것이 고달프고 팍팍했을까. 전설도 전설이지만 안의 용추골에는 구전 민요가 하나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용추 질굿내기’다.



    오르랑 내르랑 잔기침 소리는

    자다가 들어도 우리 님 소리라

    얼시구 가갔으면 갔지 제가 설마나 갈소냐



    용추폭포야 네 잘 있거라

    명년 춘삼월 또다시 만나자

    얼시구 가갔으면 갔지 설마나 갈소냐



    (중략)



    춥다 덥다 내 품에 안겨라

    벨 것이 없거든 내 팔을 벨어라

    얼시구 가갔으면 갔지 설마나 갈소냐



    그 옛날 할머니들이 부르던 민요를 흥얼거리며 나는 꺽지소를 지나 용소(龍沼)로 간다. 용소 위에 반송의 자태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도 모두 예외 없이 이 소나무의 자태로 눈길을 돌린다. 용소 위의 소나무 그늘은 용추계곡 중에서도 일품에 속한다. 반송 아래엔 두 개의 커다란 돌상(石床)이 있고, 그 아래쪽엔 또 족히 200평은 됨직한 하얀 암반이 깔려 있다. 한여름밤에 모여 앉아 놀면 죽이는 곳이다.

    장수사 부도 터를 지나 일주문을 향해 간다. 우뚝하다. 일주문 기둥은, 한쪽은 싸리나무고 다른 한쪽은 칡뿌리라고 한다. 어마어마하게 크다. 과연 저렇게 큰 칡뿌리와 싸리나무가 있을까? 장수사는 6·25 때 소실되고 지금은 그 절터 한가운데로 옛 용추분교 사동마을로 가는 길이 나 있다. 절터 한가운데로 뚫린 길이라니! 여기저기 개망초꽃이 피어 있고 까만 주춧돌은 반 넘어 풀에 덮여 있다.

    절터가 끝나는 지점. 쿵쿵쿵쿵 물소리가 들린다. 용추폭포다. 용추폭포…! 나는 괜히 마음이 바빠진다. 어서어서 폭포를 보고 싶은 까닭이다. 나는 이 나라의 모든 폭포의 전형을 이 용추폭포로 알고 있다. 그만큼 빼어나고 멋지다. 높이(십수미터)도 높이지만 전체적인 느낌, 주변 풍광이 그렇다. 진짜로 이만한 폭포가 없다.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 대구에서 왔다는 대학생 셋이 “으으으으” 이상한 소리를 내며 홀라당 벗고 수영을 하고 있다. 나는 “깊이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가 “아니다, 옛날에 우리는 폭포 중간쯤에서 다이빙을 했다”고 알려 준다. 겁 많은 요즘 아이들이 우리 같은 짓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용추폭포 꼭대기에서 오금 저리는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큰물이 지면 폭포에서 하얗게 품어 나오는 운무를 맞아보는 것도 좋다. 3년 묵은 체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용추폭포 꼭대기에 서 보기를 바란다. 흙 하나 없는 암반을 타고 흘러내리는 심심유곡 옥수도 좋지만, 사실 용추계곡의 백미는 계곡에 드리운 파르스름한 그늘이다. 때죽나무 그늘은 엷고 층층나무 그늘은 짙다. 그늘은 서러움이고 그늘은 위안인데 굴참나무 가지를 휘감고 올라간 한낮의 다래넝쿨 그림자는 흔들리고 있다. 굴뚝새는 아닌 것 같은데 까만 새 두 마리가 물가에 앉아 꽁지를 까딱거리고 있다.

    아무도 없다. 올 여름은 이번 주말엔 꼭 한 번 용추계곡으로 가 보시기 바란다.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좋은 곳을 대구 경북 사람들이 거의 독차지하고 있다. 경남 사람으로서 살짝 질투심이 느껴진다.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글·사진=유홍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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