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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의..최치원사당..건립에..대한..의견,과..함양,관광객20만명추가유치..방법제안서.
오태규       조회 : 2093  2014.01.31 23:02:34

군수에게 바란다

이곳은 군민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 정책건의, 개선이 필요한 사항 등을 군수와 직접 만나 이야기 하듯이 게재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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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내용

제목함양군에,이번에,만드는,고운,최치원,사당에..함양고유3성씨,위페,같이모시면..3성씨,후손20만명이..함양관광객,추가된다.

번호
373
작성자
오태규
작성일
2014.01.31
조회수
7
함양군에서..계획하고있는..고운,최치운,사당건립시에..최치운사당에..함양고유3성씨(함양박씨..오씨,여씨),위패을같이모시면..3성씨후손들..20만명이..함양관광객으로..추가된다..
함양의고유..성씨들이기에..타성시들보다도..함양군에..애향심이..지극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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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최치원..의역사을...현대사회에서..재조명,하여보았을때...여러사람의..위패을모시는것이..경제적이고,,효율적이다..그,실예을..보라..|★오박사(태규)전용방
오박사(태규) | 조회 12 |추천 0 |2014.01.31. 09:07 http://cafe.daum.net/ohssipeople/IdhD/679



고운,최치원..의,역사을..현대사회에서..재조명..해보았을때..
함양군은?...어떻게..함양의,역사의전당을 만들어야 하는가?..

함양군도..이제는..함양의역사..을 재조명해보고..역사의식에..잘못이 없는지?..제검토을해야할,때인것으로 본다.

함양군은..신라말엽에..유학자이고..문장가이고..역사의기록에..남아있는..극소수의사람중에..한분이고..한국전국,각지에서..자기향토에서..기록을남기었다고..자랑하는인물..최치원선생에..대하여..다시한번..현대적인..역사의관점에서..조명하고..재검토을해야한다고본다.

그,이유는?..다음과같다.

함양군이..현대의,지금까지..함양군의 절대적인,권위자..공로자..인물..로, 인정하여..함양군의..고유제사에..유일한사람으로..신(神)격으로..모시고..매년 제사을 지내오는데..과연,이것이..역사적으로,볼때에..역사기록으로..볼때에...합리적인가?..옳은일인가?...반성해볼때이다.

최치원은?..신라말엽에..유명한사람이지만..함양군태수로..오래봉직하지도않았고..전국을 유람하며..방랑인,생활을한,사람이였다.

최치원은?..한국,전국에(해운대..정읍태수등)..여러지방에서..자기고향을..거쳐간..사람으로..전국각지에서..유명세..가있다.

사대사상이..사회전체을..지배하던시절..신라..고려..조선시대에는...당나라..명나라..등의..중국에서..벼슬하거나..이름을남기면..그,시대에..일약..유명인이..되었던시절에..살았던..인물이..최치원선생이다.

함양에서는..함양의 상림숲을..만들었다하나?..확실한,역사적..증거도..부족하고..

설형..옛날..함양에서..치수사업으로..상림숲을 만들어..농민들의..농사짓는데..도움을 주었다하나?...함양군..2000년간의,역사에...함양군을..지켜오고..살아온...수많은태수..수많은관료..수백만명의...함양군..농민들..군민들...대다수의..삶과..공적에..비교될수있겠는가?...

더욱이..현대는..민주주의사회로..국민이..주인이고..군(郡)에서는..군민(郡民)이.주인이고..군수(태수)는..군민이..선거로뽑고..군수는..일정기간..봉사하다..떠난다...이런,민주사회에 살고있는...우리가..사대사상의..아부성,잔재을..현재에도..억지로..과대하게..미화시켜..우상화하여..군민(郡民)들의..혈세을..드려야하겠는가?

함양군의..관광발전..을,위해서라면..경제적이고..실용성있는..다른방법도..많을것이다.

최치원의...단독,사당건립만이..관광객이...많이..찾아온다는..보장은없다.
예을들면...전북.정읍의..최치원사당에는..여러분들의..유학자들을..함께..위패을모시고있다.

전국,여러곳의..최치원,사당에는..많은,유학자들..의병들의..비석..위패,등이..함께..모셔져있는것이..현실이다.
(아래,자료참조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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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곳곳의..최치원,사당에..그,지방의..역사의인물들이..위패와..비석으로..
기념물이..모셔져있는것이..현실이고..경제적이기에..
함양군에서도...1000년간의,역사을지닌..함양고유3성씨의..위패와..기념비을..이번에..건립되는..최치원사당에..함께..세워준다면?
함양군은 경제적인방법으로..3성씨의..후손들..전국에..20만명의관광객을..더확보할수있읍니다.
함양박씨..12만명..함양오씨..3만명..함양여씨..3만명..의..함양고유3성씨후손들은?.
근본적으로..함양을..고향으로..생각하고있기에..함양향토에,대한..애정도..깊고..
대단합니다.
그러기에..이번기회에..함양군에서..함양고유3성씨..을.인정해주고...역사증표..기념비,을..만들어준다면..
고유3성씨는..능력과..잠재력..경제력이..무한하기에..관광객..뿐만아니라..함양군의발전에..크게...도움을줄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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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민들도..이제는..현대의..정서에..어울리게..함양군의..땅과..대지을...사랑하며..땀흘려서..땅을개간하고..일하였단..함양군의..수많은..무명의..군민들..농민들..나라,을위하여..군대에..가고..몸을받쳤던..영령들..옛날사람들을..추모하고...기리는것이...

왕이..지배하던..봉건사회..가,아닌...현대에 살고있는...우리시대에..우리가..지금..찾아야하고..추모해야할...역사의진실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함양군에서..최치원의..고유제..만,지내고...최치원의역사관..만...치장하고...만드는것은?...옳바른,일이아니다..



이제는..함양군에서. 일천년간,이상을..대대로 살아오면서..함양의..땅을개간하며..나라에..충성하고..봉사해온..함양의고유의..3성씨들도..옛날의...함양의 실존역사의 인물로..새롭게..역사을발굴하고..함양의..고유제..제사에도..모셔야된다..고,사료된다.



함양군은...무엇보다도...잃어버린...함양의,가야역사...500여년간(서기560년이전역사)을 찾는것이..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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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관계로...최치원..이란.. 인물의..역사의진실을...함양군민들...모두가...알고지내어야한다...최치원은?..산라말엽에..유명한,학자이고..문장가이지만..함양군의...유일신(神)..이아니다.

문장을잘하는...문학가였고...관료였고...방랑아였다...함양군을 구한..영웅도아니요...함양군에서..땅일구며...산사람도 아니였다...

함양군에..태수로..잠깐..쉬었다간..몇년간..봉직의..태수였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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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 ‘고운 최치원 사당’ 짓는다
2015년까지 문예회관 뒤편에
사당·사료관·솟을삼문 조성



기사입력 : 2013-12-18 페이스북 트위터 미투데이










함양군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배울 수 있고, 선생을 기리기 위한 ‘고운 최치원 선생 사당’을 조성한다고 18일 밝혔다.

군에 따르면 함양읍 교산리 문화예술회관과 만남의 광장 뒤편에 총 사업비 50억 원(부지매입비 15억 원, 공사비 35억 원)으로 부지면적 1만8521㎡, 건축면적 1만4868㎡ 규모에 추모사당, 역사사료관, 솟을삼문, 광장 등을 2015년까지 조성할 계획이다. 군은 오는 20일 착공식을 갖는다.

이 사업은 추모사당 조성을 통해 선생을 기리고, 역사사료관에서는 고운 선생의 학문과 사상 등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학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고운 선생이 조성한 상림 숲과 연계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군은 앞서 최치원 선생 업적 중 하나인 상림 숲 조성과 관련, 선생의 애민정신을 스토리텔링화하고 관광자원화한 ‘고운 최치원 선생 역사공원’을 상림 인근에 조성했다.

최치원 선생은 통일신라 말기 제47대 헌안왕 원년(857년)에 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났으며, 호(號)를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했고 어릴 적부터 천재적 재능을 타고나서 신동이라 불리었으며 풍채가 아름답고 정밀하며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삼국사기 본전에 기록돼 있다.

최치원 선생은 894년 38세 때 천령(함양)태수로 부임, 여름이면 위천(謂川)이 자주 범람해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가자 물길을 서남향으로 돌리기 위해 지리산, 덕유산, 백운산 등 고산지대의 잡목들을 캐다 심어 10리에 이르는 숲을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방재·방풍 목적으로 조성한 이 숲은 전국 유일의 인공 호안 활엽수림이다.

그동안 세월이 지나면서 시가지 확장으로 중간부분이 끊겨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어 하림은 소멸되었다가 지난 2005~2009년 5년간 141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10만7000㎡ 규모의 하림을 복원했다.

군 관계자는 “최치원 선생 사당 조성사업으로 인적자원을 관광자원화해 경주최씨 종친회 등 많은 관광객 유치에 기여하게 된다”며 “역사의 중요 관광자원으로 보존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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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정읍의 무성서원
2013.10.17
지정된 전국 9개 사원, 즉 소수서원(영주), 남계서원(함양), 옥산서원(경주), 도산서원(안동), 필암서원(장성), 도동서원(달성), 병산서원(안동)... 신라 시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이 현령을 지낸 태산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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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이 진나라 목공에서 위나라 조조 사당을 새모양 동상을 만들어 모시고... 이두문자 이름 여단(厲壇)이라고 숫돌여'厲 '자를 써서 새대단. 숫돌단. 수도단. 이름으로 전쟁에서 죽은 병사등등 위령제사로 전국의 군청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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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은 최치원 학당(學堂) 서울대학교 발원지
2010.06.09
이름은 전국 어디에도 없고 삼국시대와 신라시대에도 유적이나 자료가 전혀... 세력가 유자광이 고모부 권채의 묘가 세종대왕의 영능으로 지정되자 이곳에 권채의 묘를 하 사받아 권씨의 제각으로 사용하고 최치원의 사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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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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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최치원 초상
출생 857년
경주 사량부
사망 미상
가야산 해인사
국적 신라
별칭 자는 고운 또는 해운
학력 885년 한림학사
직업 학자, 문인

최치원(崔致遠, 857년~?)은 신라 말기의 문인, 유학자이다.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다.

6두품 출신으로서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하여 6년만에 당의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고병의 막하에서 《토황소격문》을 지어 당 전역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승무랑 시어사로서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귀국하여 헌강왕으로부터 중용되어 왕실이 후원한 불교 사찰 및 선종 승려의 비문을 짓고 외교 문서의 작성도 맡았으며, 시무 10여 조를 올려 아찬 관등을 받았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이 득세하며 지방에서 도적들이 발호하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이상을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관직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귀국 직후 당에서 쓴 글을 모아 헌강왕에게 바쳤던 《계원필경》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으로 꼽히며,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난랑비서(鸞郎碑序)》는 신라 화랑도의 사상적 기반을 말해주는 자료로서 주목받는다.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1.1 입당 유학
1.2 고병의 막하에서
1.3 신라 귀국
1.4 만년
2 관련 작품
2.1 드라마
3 기타
4 저서
5 같이 보기
6 주석
7 참고문헌

생애[편집]
《삼국사기》에서 당으로 유학을 떠났던 경문왕 8년(868년) 당시의 12세라는 나이로 역산해보면 최치원의 탄생은 헌안왕 1년(857년)의 일이다. 최치원의 아버지는 최치원 자신이 찬한 《초월산 대숭복사비명》 병서에서 견일(肩逸)이라는 이름을 밝혀놓고 있는데, 경문왕이 곡사를 대숭복사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개창 불사를 벌일 때에 김순행과 함께 불사를 맡았다고 되어 있다.

최치원의 본적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왕경(王京)의 사량부, 《삼국유사》는 본피부로 기록하고 있는데, 《경상도지리지》·《동국여지승람》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들이 《삼국사기》를 따라 사량부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1834년에 발간된 《교인 계원필경》의 서문을 쓴 서유구는 최치원을 호남 옥구 사람이라고 기록하거나,[1] 고군산 사람이라고 한 기록도 존재한다.[2] 고군산에는 현재 최치원의 유적지로 여겨지는 곳이 남아 있으며,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에 따르면 최치원의 신사가 고군산에 있었다고 한다.[3]

입당 유학[편집]
최치원의 유학이 국비로 이루어진 것인지 사비로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는 "나이 열두 살에 바다를 따라 배로 당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혔다" 라고 한 것이나, 《택리지》 전라도 영암군조에는 "최치원과 김가기, 최승우는 상선을 따라 당으로 들어가 당의 제과에 급제했다."고 한 기록은 최치원이 신라의 다른 숙위학생들과는 달리 사신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상선을 타고 당에 들어간 것으로 관비 유학생이 아닌 사비 유학생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으며 오늘날 이것은 한국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가 되어 있다. 국비유학생으로 보는 근거는 최치원 자신의 업적이나 당에 있을 때의 활동, 귀국 뒤의 국가적인 대우나[4]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이 최치원에게 말한 '10년'이라는 기간[5]과, 최치원 자신이 지은 「헌시계」(《계원필경집》권17)에서 "아무(최치원)와 같이 같은 자는 외방(外方)에서 건너온 데다 재예(才藝)도 하품(下品)에 속합니다. 그래서 유궁(儒宮)에서 덕행을 사모하며…" 라고 한 내용이나[6] 《성주사 낭혜화상비》에서 진성여왕이 최치원에게, "돌아보건대 문고(文考, 경문왕)께서 (최치원을) 국자로 뽑아 과거를 응시하게 하셨으며 강왕께서는 국사로서 예우하셨다" 라고 한 데서 생각할 때 국비 유학생임을 유추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경문왕 8년(868년) 당으로 유학을 떠나는 최치원에게 “10년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써라.”고 말했으며, 최치원 자신도 아버지의 말을 받들어 ‘다른 사람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하는’ 심정으로 학문에 정진했다고 밝히고 있다.[7] 당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경문왕 14년(874년), 최치원은 당의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급제한 뒤 2년 동안 별다른 직책 없이 동도(東都)를 유랑하며 시를 지었는데, 이때 지은 시가 부 5수에 시 100수, 잡시부 30수로 모두 3편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 희종 건부 3년(876년)에[8] 드디어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초투헌태위계」). 훗날 최치원은 자신이 현위 시절 지은 시와 부를 모아 《중산복궤집》을 지었으며 이는 《계원필경》과 함께 헌강왕에게 헌상되었다.

그러나 율수현위가 된 이듬해 겨울에 최치원은 율수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에 응시하고자 종남산에 들어간다. 하지만 일정한 수입도 없이 생활이 궁핍해지고 학업마저 어려운 상태에서 당에서는 황소의 난이 일어나는 등의 어려움이 닥쳤다. 생활이 궁핍해진 상태에서 최치원은 희종 광명 원년(880년)) 5월 절도사 고병의 추천으로 그의 막하에 관역순관으로 들어가게 된다.[9]

고병의 막하에서[편집]
광명 2년(881년) 고병이 황소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자 최치원은 도통순관으로 고병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7월 8일에 반란의 수장 황소를 꾸짖는 격문, 이른바 《토황소격문》을 지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최치원의 격문에서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 의논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고 의논하였다"는 대목에서 황소가 놀라 그만 앉아있던 의자에서 넘어졌다고 적고 있다. 이 격문으로 최치원의 문명(文名)은 당 전역에 퍼졌으며, 최치원은 고병의 도통순관으로서서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병은 희종 중화 2년(882년) 정월에 출병할 의욕이 없다는 이유로 제도행영병마도통직에서 파해졌지만, 이후로도 최치원은 고병 개인의 종사관으로서 그럭저럭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 《계원필경》은 바로 이때 최치원이 지은 글과 여러 공문서를 모은 것이다.

신라 귀국[편집]
헌강왕 10년(884년) 음력 10월 신라 사신으로서 회남에 왔던 김인규와 고국 소식을 전해 온 사촌동생 서원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는데, 회남을 출발한 신라의 배는 풍랑으로 유산에서 바람이 멎기를 기다렸고, 곧 겨울이 되어 곡포에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헌강왕 11년(885년)에야 신라에 도착한다.

신라에서 그는 당에 보내는 국서를 작성하거나 왕실 사찰의 비문과 기, 찬, 발원문 등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문장을 지었다. 당의 사신 자격으로 귀국한 최치원은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가 되었으며, 《초월산대숭복사비》의 글을 지었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자신이 당에서 저작한 《사금체시》 5수(1권), 《오언칠언 금체시》 100수(1권), 《잡시부》 30수(1권), 《중산복궤집》 1부(5권), 《계원필경집》 1부(20권) 등 28권의 문집을 추려 헌강왕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7월에 헌강왕이 사망하고 정강왕이 즉위하였다. 이후 최치원은 진골 귀족들에게 밀려 외직(外職)인 태산군(太山郡)의 태수(太守)로 나가게 된다. 정강왕 2년(887년) 11월에 지은 《왕비 김씨 위선고급망형추복 시곡원문》에서 자신을 부성태수라고 하고 있어, 이듬해에 태산군에서 다시 부성군으로 부임지가 옮겨진 것을 알 수 있다. 정강왕 사후 진성여왕 원년(887년)과 4년(890년), 7년(893년)에 각각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등을 각각 지었는데, 이는 다. 진성여왕 7년(893년) 납정절사로 임명되어 당으로 파견되었던 병부시랑 김처회가 그만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익사하자, 조정은 다시 혜성군태수 김준을 고주사로 삼고 부성군태수로 있던 최치원을 하정사로서 당에 보냈지만, 당시 흉년이 들고 도처에 도적들이 들끓어 길이 막히는 바람에 갈 수 없었다.

진성여왕 8년(894년)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상소해서 아찬이 되었다. 시무 10여 조를 올린 시기에 최치원은 천령군태수로 나가 있었는데,[10]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바 해인사의 승려 희랑에게 시를 지어주었다고 한 것은 이 무렵의 일로 여겨진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최치원의 관직을 “방로태감 천령군태수 알찬”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현존하는 문집에 남아 전하는 증희랑화상시 6수 중에는 이러한 문구가 보이지 않지만, 천령군 즉 함양에는 최치원이 태수로 재직하던 당시 올라가 노닐었다는 학사루가 있고, 최치원이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했다는 함양상림도 존재하고 있다.

만년[편집]
그러나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인하여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태조 왕건》(KBS, 2000년~2002년, 배우:김성수)
기타[편집]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천부경을 전하는데 최치원이 관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11]

부산 동백섬 일대의 경관에 반한 최치원은 자신의 호 '해운'을 따서 그 지역 지명을 해운대라고 붙였다고 한다. 최치원이 직접 새겼다는 '海雲臺' 석각도 동백섬 절벽 한켠에 남아있다. 이러한 이유로 최치원의 동상과 시비가 동백섬 언덕에 생겼으며, 해운대구와 최치원이 벼슬을 하며 토황소격문을 지었던 양저우시구는 자매결연을 맺었다.

저서[편집]
《금체시》
《계원필경》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
《잡시부》
《중산복궤집》
《오언칠언금체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부석존자존》
《법장화상전》
《석이성전》
《쌍녀분전기》
같이 보기[편집]
고운국제교류사업회
생육신
금오신화
부도지
천부경
주석[편집]
이동 ↑ 오윤희도 최치원이 옥구 출신이라는 쪽으로 무게를 두면서 그가 6두품의 신분을 얻게 된 것이 당의 관직을 가지고 귀국했기에 가능하였을 것으로 본다.(오윤희, 「호서 지방의 최치원 사적고」 《사학연구》 51호, 한국사학회, 1996) 조선 후기의 한문소설 《최고운전》은 최치원의 아버지가 문창령(文昌令)이라는 문창 지방의 지방관직을 맡고 있을 때 태어났고 이 때문에 최치원이 문창후로 추증된 것이라고 했으나 이능화는 「문창령」이라는 직함은 「문창 출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문장에 뛰어나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이능화, 《조선무속고》 제19장, 고군산 최치원신사조).
이동 ↑ 이능화, 앞의 책. 이상배는 1983년에 《문리연구》 창간호에 발표한 「문창후 최치원의 출생지 소고」에서 최치원의 출생지는 지금의 내초도를 포함한 고군산 열도의 어느 섬일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하였고, 다시 2000년에 열린 태산 선비문화 조명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최치원의 출생지에 관한 재고」에서 최치원이 태어난 곳은 고군산 열도의 선유도로서 아주 한미한 가계의 소생인 그가 독학으로 자라다 당의 상인에게 발견되어 당의 배를 타고 입당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경로로 28세에 환국하였으며 환국 후에 경주에서 살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고군산은 이능화가 최치원의 또 다른 출생지 후보로서 지적한 두주(杜州)와 《최고운전》의 문창에 속한 섬이기에, 최치원의 출생지를 고군산으로 볼 경우 이들 기록의 내용과도 무리가 없게 된다고 보았다.
이동 ↑ 이능화, 앞의 책. 이재운은 최치원의 출생지에 대해, 대체로 그의 집안인 최씨의 관향과 최치원의 출생지 및 거주지를 굳이 일치시켜보려는 데에서 혼선이 생기며, 일단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왕경 즉 서라벌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볼 때 그의 거주지가 서라벌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굳이 고택이 있고 최씨 성을 사성받은 땅이라고 해서 굳이 최치원의 출생지로 규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지만 대체로 가장 유력한 곳은 사량부이며, 나머지 후보군은 그가 관직생활을 했거나 관직을 버리고 산천을 따라 독서했던 땅일 것으로 보았다.(이재운, 「고운의 생애와 정치활동」 한국사학회 ·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편 《신라 최고의 사상가 최치원 탐구》 주류성, 2001, p.39)
이동 ↑ 신형식, 「숙위학생고」 《역사교육》 11 · 12합집, 1969, p.75.
이동 ↑ 謝海乎, 「唐代留華外國人生活考述」, 대만: 상무인서관, 1976, p.70. 이미 조선 후기의 국학자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신라 유학생들의 체류 연한이 10년이었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이 말한 10년과 일치한다.
이동 ↑ 유궁은 국학, 즉 당시 당의 국자감을 말한다. 朴鐘根, 「최치원의 정치 이념과 종교관」 《역사교육논집》3, 1982.
이동 ↑ 《계원필경》서.
이동 ↑ 「초투헌태위계」에는 "열두 살에 계림을 떠나고 스무 살에는 앵곡에서 옮기게 되어 바야흐로 청표의 벗들을 접하고 곧 황수 벼슬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최치원이 나이 스무 살 때에 황수, 즉 승·위의 직책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는 건부 3년 즉 신라 헌강왕 2년에 해당한다(이재운, 앞의 책, p.47)
이동 ↑ 최치원이 고병의 휘하에 들기를 청하는 「초투헌태위계」·「재계」나 「헌시계」 등에서 최치원은 고병을 가리켜 사도상공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구당서》에 따르면 고병이 검교사도가 된 것은 건부 6년(879년) 겨울의 일이며 그 뒤 태위가 되기까지의 사이에 최치원이 고병에게 글을 올려 문객이 되기를 청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동 ↑ 연암 박지원의 「함양군학사루기」(《연암집》권1)에는 천령군태수로 있으면서 시무 10여 조를 올렸으며 또한 이곳에서 관직을 내놓았다고 적고 있다.
이동 ↑ 제1부 - 환단고기, 위서인가 진서인가 신동아 기사
참고문헌[편집]
《최치원 신연구》, 당인핑 저/마중가 역/김복순 감수, 한림대학교 출판부, 2004년
한국의 문화인물
네이버 캐스트 -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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